국보/사적/명승윤두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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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정일시 : 1987. 12. 26
◆ 소 재 지 : 전남 해남군 해남읍 연동리 82 윤씨종가
◆ 시 대 : 조선시대(1710년대)
◆ 크 기 : 가로 20.5 ㎝ 세로 38.5 ㎝
◆ 재 료 : 한지
윤두서(尹斗緖)는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의 증손으로서 호를 공재(恭齋)라 하였다. 1693년(숙종 19)에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집안이 남인계열이었고 당쟁의 심화로 벼슬을 포기하고 학문과 시·서·화로 생애를 보냈다. 47년이라는 짧은 생애를 사는동안 2권의 문집(文集)과 화첩(畵帖)을 남긴 조선중기의 학자겸 화가였다.
우리나라의 자화상은 「공민왕조경자사도(恭愍王照鏡自寫圖)」가 허목(許穆)의 「미수기언(眉 記言)」에 보이고 김시습(金時習)에게도 「매월당집(梅月堂集)」에 자화상이 있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고려시대부터 자화상이 있었던 듯 하며, 18세기에 들어와 이광좌(李光佐)·강세황(姜世晃)·윤두서(尹斗緖)의 자화상 등이 작품으로 전해오고 있다.
윤두서 자화상은 종이 바탕에 엷은 채색을 한 것으로 1710년(숙종 36) 제작된 것으로 전하며 다른 자화상과는 달리 상용형식이나 표현기법에 있어 특이한 양식을 보이는 수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작품은 이성을 성찰(省察)하는 철학적인 짙은 훈기를 느끼게 하고, 그 털끝 하나 소홀히 하지 않은 정기(精氣)어린 그의 선묘(線描)된 모습에는 사실(寫實)을 초월한 인간 본연의 공제 자신을 드러내고 있다. 자신을 스스로 정시(正視)하는 자세로 오랜 준비 끝에 제작된 것으로 여겨지며, 공재 본연의 모습을 보여주는 듯한 동양적인 아름다움이 서려 있다. 화폭 가득히 안면만을 사출하였는데 자아인식이 매우 수준높게 묘사되어 있다. 우선 안면은 보는 사람이 정시할 수 조차 없으리만큼 화면위에 박진감이 들어차 있는데, 자신과 마치 대결하듯 그려져 있다. 화법은 당대의 기법을 응용하여 안면은 깔끔한 구륵(鉤勒)보다는 오히려 무수한 붓질을 가하여 그 붓질이 몰리는 곳에 어두운 분위기가 형성되게끔 하였다. 또한, 이 화상에서는 점정(點睛)의 효과를 거두고 있는데, 그다지 많지 않은 연발수(蓮髮鬚)형태의 수염이 안면을 화폭위로 떠밀 듯이 부각시키고 있다. 윤두서는 그의 친구 심득경(沈得經)의 초상화를 추화(追畵)한 바 있으며, 그때 화폭 속에 그 인물이 지닌 특징적인 분위기 표출에 성공함으로써 전신사조(傳神寫照)에 뛰어남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 자화상에는 심득경상에서 표현하였던 분위기 이상의 핍진력이 유감없이 발휘됨으로써 탁월한 가작으로 남게되었다.
조선시대 중기와 후기의 변환기에 활동한 윤두서는 말과 인물화를 잘 그렸으며, 산수화를 비롯하여 회화작품은 대체로 중기의 화풍을 바탕으로 하여 전통성이 강한 화풍을 지녔다.그는 말그림과 인물화는 뛰어난 필력으로 정확한 묘사를 보여주고 있으며 기타 그림에서 실학적인 태도도 엿볼 수 있어 16∼8세기 중·후반이후의 화단을 풍미한 남종화풍과 풍속화의 선구적 위치에 놓여 있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