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사적/명승해남 대둔산 일원
관련링크
본문
◆ 지정번호 : 사적 및 명승 제9호
◆ 지정일시 : 1998. 12. 23
◆ 소 재 지 : 전남 해남군 삼산면 구림리 799외
◆ 시 대 : 삼국시대
◆ 크 기 : 8,740,467㎡
◆ 분 류 : 명승 및 사찰건축
대둔산은 천연기념물 왕벚나무자생지를 비롯하여 후박나무, 동백나무, 비자나무등의 온대림을 구성하는 상록활엽수와 물푸레나무, 박달나무 등 온대림을 구성하는 많은 양의 낙엽활엽수로 구성되어 잘 보존된 삼림지역이므로 그 경관이 매우 뛰어난 곳으로 알려져 있다.
대흥사는 대둔산 북쪽 기슭에 위치하며, "대둔사" 또는 "한듬절"로 불리우는 사찰로서 백제 무령왕 14년(514)에 창건된 것으로 전하며,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한 「북원」과 천불전, 대광명전을 중심으로 한 「남원」으로 구분되는 독특한 가람배치를 하고 있다. 경내에는 13 대종사와 13 대강사를 비롯한 역대 고승들의 부도와 비석을 봉안한 비전이 있으며, 호국선사인 서산대사의 의발을 보유하고 있는 서산종의 종찰로 선교 양종의 대도량의 면모를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지정문화재 현황으로는 총 14점(국가지정 5점, 시도지정 9점)인데, 국가지정문화재(5점)로는 보물 제48호 대흥사북미륵암마애여래좌상, 보물 제88호 탑산사동종, 보물 제301호 대흥사북미륵암삼층석탑, 보물 제320호 대흥사응진전전삼층석탑, 천연기념물 제173호 대둔산 왕벚나무자생지(64,793㎡)가 있고, 시·도지정문화재(10점)로는 도유형 제48호 대흥사천불전, 도유형 제52호 대흥사천불상, 도유형 제57호 대흥사서산대사부도, 도유형 제93호 대흥사용화당, 도유형 제94호 대흥사대광명전, 도유형 제166호 대흥사서산대사유물(일괄; 6종 3점), 도유형 제167호 대흥사정조친필서산대사화상당명, 도유형 제179호 대흥사관음보살도, 도기념물 제19호 표충사(일원)이 있다.
대흥사는 현재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본사이며 대흥사의 역사를 기록한 《대둔사지》에 의하면, 426년에 신라의 정관존자(淨觀尊者)가 창건하여 '만일암'이라 하였고, 508년에 이름을 전하지 않은 선행비구(善行比丘)가 중건하였다는 〈만일암고기〉의 기록, 875년에 도선(道詵)이 당나라에서 귀국하여 500사찰을 짓는 것이 좋겠다고 상소하였는데, 대흥사도 그 중의 하나라는 설 등이 모두 망라되어 있으나, 대둔사지 자료를 모았던 혜장(惠藏)은 이들 기록이 창건자의 활동시기로 볼 때 모두 신빙성이 없다고 보고 있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이 절의 앞마당에 신암(信菴)·총은( 隱)·성유(性柔)등 세 승려의 부도가 있었다고 하였으나, 이들의 행적이 알려진 바는 없고, 고려때 승려이므로 대흥사가 고려이전에 창건된 것이 확실하므로 혜장이 주장한 신라말의 창건설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아직 대규모 사찰의 면모는 갖추지 못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흥사가 크게 중창된 것은 서산대사(西山大師)가 대흥사를 '삼재가 들어오지 않는 곳이요, 만세토록 파괴됨이 없는 곳이며, 종통의 소귀처(三災不入之處 萬歲不毁之處 宗統所歸之處'라 보고 자신의 의발(衣鉢)을 대둔산에 전할 것을 부촉한 임진왜란 뒤의 일이다. 1604년(선조 37)에 해남의 외딴곳에 의발을 전한 서산대사의 배려에 의해서 배불(排佛)의 강압속에서도 많은 인재를 배출하는 선교양종(禪敎兩宗)의 대도량으로 면모를 일신하게 되었다.
1665년(현종 6)에는 심수(心粹)가 대웅전을 중창하였고, 1669년에는 표충사(表忠祠)를 건립하였으며, 1811년(순조 11)에 천불전이 불타자 1813년에 완호(琓虎)와 제성(濟醒)이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흥사는 배불의 그늘속에서도 수 많은 강사와 종사를 배출하였다. 그 대표적인 고승은 13 대종사(大宗師)와 13 대강사(對講師)이다.
13 대종사를 출생순으로 열거하면 해동 화엄종의 중흥조로 존경받았던 의심(義諶), 담론(談論)을 잘해서 많은 사람들을 교화하였던 삼우(三遇), 화엄(華嚴)의 도리와 백가(百家)에 통달하였던 도안(道安), 육신보살(肉身菩薩)로 칭송받았던 추붕(秋鵬), 전국을 순방하며 화엄대회를 열었던 지안, 그 학문이 유학자들 사이에서도 명망이 높았던 대우(大愚), 검소와 청빈의 생활로 평생을 살았던 회정(懷淨), 문자를 떠난 곳의 진리를 설파하여 마음이 근원을 찾도록 가르쳤던 새봉(璽 ), 대흥사의 정진당(精進堂)에서 늘 화엄법회를 열었던 체정(體淨), 인욕행이 남달리 뛰어났던 해원(海源), 대승경전에 통달하여 많은 저술을 후세에 남겼던 유일(有一), 다선일미사상(茶禪一味思想)으로 이름난 의순(意恂)등이다. 13 대강사들은 모두가 제10대 대종사였던 체정의 문도로 원오(圓悟)·광열(廣悅)·영우(永愚)·승제(勝濟)·성규(聖奎)·정일(鼎馹)·태관(泰瓘)·행인(幸仁)·복혜(福慧)·윤우(尹佑)·시연(示演)·혜장(惠藏)·각안(覺岸) 등이다.
《대둔사지》에 의하면 대흥사의 옛모습은 남원(南院)과 북원(北院)으로 나뉘어 있었다. 북원은 대웅보전·나한전·시왕전(十王殿)등 24개소의 당우가 있었다고 하나 현재의 사역은 북원보다 남원이 훨씬 넓은데도 좁은 북원쪽에 더 많은 당우가 집중적으로 건립되어 있다.
현재의 대흥사는 사지의 북쪽에서 흘러내리는 금당천(金塘川)의 냇물을 중심으로 가람이 남붇으로 나뉘어 있고, 지금도 남원·북원이라고 한다. 또 남원·북원의 법당들은 나름대로의 특색을 지닌 별원(別院)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북원의 대웅전을 중심으로 한 일군과 남원의 중앙부에 위치한 천불전과 서산의 유물이 있는 표충사를 중심으로 한 일곽, 다도로 유명한 초의(草依)가 중건하였던 대광명전(大光明殿)을 중심으로 한 일곽으로 분류할 수 있다. 대웅보전은 심수가 1665년 봄에 중건을 시작하여 1667년 가을에 완성한 건물로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다포집이다. 대웅보전의 현판은 조선후기의 명필인 이광사(李匡師)가 쓴 것이며, 내부에는 조선후기에 만든 목조삼존불과 광무연가에 조성된 후불탱화가 있을 뿐 비교적 단조로운 편이다. 대웅전 앞에는 침계루(枕溪樓)가 냇가에 연이어 있고 좌우에는 백설당(白雪堂)·세진당(洗塵堂)의 승사(僧舍)가 있다.
백설당에는 김정희가 쓴 '무량수전(無量壽殿)'의 편액이 있으며, 이 건물은 현재 큰 방으로 사용되고 있다. 대웅보전 동편에는 응진전(應眞殿)이 있으며, 안에는 석가여래삼존불을 중심으로 16나한상이 봉안되어 있다. 응진전앞에는 보물 제320호인 대흥사 응진전전 삼층석탑(大興寺應眞殿前三層石塔) 1기가 있다.
전하는 말로는 신라 자장(慈藏)이 중국에서 가져온 석가여래의 사리(舍利)를 봉안한 사리탑이라 한다. 전라남도유형문화재 제48호인 천불전은 1811년(순조11)에 불탄 뒤 1813년에 중건한 것으로 내부에는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52호인 천불상이 봉안되어 있다. 이 천불상은 옥돌로 만든 것으로, 완호 등 10인이 6년에 걸쳐 경주옥돌로 조성하였다.
천불이 완성된 뒤 해로를 통하여 이 절로 옮기다가 풍랑을 만나 표류하여 일본에 닿게 되었으나, 일본인들의 꿈에 이 천불이 나타나서 "우리는 지금 조선국 해남의 대흥사로 가는중"이라 하여 다시 대흥사로 돌아오게 되었다고 한다. 천불전이 좌우에는 불경을 배우는 학슬들이 기거하는 용화당(龍華堂 : 전남유형 제93호)과 강사가 기거하는 건물이 있으며, 정면에는 가허루(駕虛樓)가 있다.
표충사는 대흥사의 사격(寺格)을 보여주는 대표적 건물로서 임진왜란때 승병을 조직하여 공훈을 세웠던 서산대사와 그의제자 사명(四溟)과 처영(處英)의 영정을 봉안하였으며, 전라남도기념물 제19호로 지정되어 있다.
표충사 일원의 당우배치는 표충사를 중심으로 좌우에 표충비각(表忠碑閣)과 조사당(祖師堂), 정면에 삼문, 삼문 밖에는 2층 누각인 의중당(義重堂)이 있다.
또 이중당의 동쪽에는 서산대상의 유품을 비롯하여 사중유물(寺中遺物)을 보관하는 보장각(寶藏閣)이 있다.
표충사의 건물은 1669년에 건립되었고, 편액은 정조의 친필이며, 정면 3칸의 맛배집이다. 이중당은 당시 6군의 군수가 봄·가을로 표충사에 제사지낼 때 가지고 온 제물을 차리던 곳으로서 정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집이다. 보장각에는 선조의 하사품인 옥발(玉鉢)·비취옥발(翡翠玉鉢)·수저·금란가사(金 袈裟)·금자병풍(金字屛風)과 표충사총섭사령패, 서산대사의 친필·교지·신발·초의가 그린 관음도·대광명전 상량문·승군단(僧軍團)의 표지물·철제방패, 금과 은으로 쓴 불경, 금동불상 등 총 24종의 유물이 있다.
대광명전(전남 유형문화재 제94호)은 표충사 동쪽 300m 지점에 있으며, 조선후기에 초의가 건립하였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맛배집으로, 내부에는 비로자나불상을 봉안했고 정자( 字)의 천장에는 연화문과 운학(雲鶴)을 그렸다.
이 연화문과 운학문양은 그 색채뿐 아니라 문양자체가 다른곳에서 보기 힘든 작품이다. 전하는 말로는 초의가 직접 단청을 하였다고 한다. 대광명전 옆에는 고승들의 영정을 봉안한 정면 9칸의 보련각(寶蓮閣)과 요사채가 있다. 이밖에도 해탈문과 대흥사 역대고승들의 부도를 봉안한 비전이 있다. 이 비전에는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57호인 서산대사 부도를 비롯하여 대흥사 13 대종사와 13 대강사등의 부도 및 비가 있다.
◆ 지정일시 : 1998. 12. 23
◆ 소 재 지 : 전남 해남군 삼산면 구림리 799외
◆ 시 대 : 삼국시대
◆ 크 기 : 8,740,467㎡
◆ 분 류 : 명승 및 사찰건축
대둔산은 천연기념물 왕벚나무자생지를 비롯하여 후박나무, 동백나무, 비자나무등의 온대림을 구성하는 상록활엽수와 물푸레나무, 박달나무 등 온대림을 구성하는 많은 양의 낙엽활엽수로 구성되어 잘 보존된 삼림지역이므로 그 경관이 매우 뛰어난 곳으로 알려져 있다.
대흥사는 대둔산 북쪽 기슭에 위치하며, "대둔사" 또는 "한듬절"로 불리우는 사찰로서 백제 무령왕 14년(514)에 창건된 것으로 전하며,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한 「북원」과 천불전, 대광명전을 중심으로 한 「남원」으로 구분되는 독특한 가람배치를 하고 있다. 경내에는 13 대종사와 13 대강사를 비롯한 역대 고승들의 부도와 비석을 봉안한 비전이 있으며, 호국선사인 서산대사의 의발을 보유하고 있는 서산종의 종찰로 선교 양종의 대도량의 면모를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지정문화재 현황으로는 총 14점(국가지정 5점, 시도지정 9점)인데, 국가지정문화재(5점)로는 보물 제48호 대흥사북미륵암마애여래좌상, 보물 제88호 탑산사동종, 보물 제301호 대흥사북미륵암삼층석탑, 보물 제320호 대흥사응진전전삼층석탑, 천연기념물 제173호 대둔산 왕벚나무자생지(64,793㎡)가 있고, 시·도지정문화재(10점)로는 도유형 제48호 대흥사천불전, 도유형 제52호 대흥사천불상, 도유형 제57호 대흥사서산대사부도, 도유형 제93호 대흥사용화당, 도유형 제94호 대흥사대광명전, 도유형 제166호 대흥사서산대사유물(일괄; 6종 3점), 도유형 제167호 대흥사정조친필서산대사화상당명, 도유형 제179호 대흥사관음보살도, 도기념물 제19호 표충사(일원)이 있다.
대흥사는 현재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본사이며 대흥사의 역사를 기록한 《대둔사지》에 의하면, 426년에 신라의 정관존자(淨觀尊者)가 창건하여 '만일암'이라 하였고, 508년에 이름을 전하지 않은 선행비구(善行比丘)가 중건하였다는 〈만일암고기〉의 기록, 875년에 도선(道詵)이 당나라에서 귀국하여 500사찰을 짓는 것이 좋겠다고 상소하였는데, 대흥사도 그 중의 하나라는 설 등이 모두 망라되어 있으나, 대둔사지 자료를 모았던 혜장(惠藏)은 이들 기록이 창건자의 활동시기로 볼 때 모두 신빙성이 없다고 보고 있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이 절의 앞마당에 신암(信菴)·총은( 隱)·성유(性柔)등 세 승려의 부도가 있었다고 하였으나, 이들의 행적이 알려진 바는 없고, 고려때 승려이므로 대흥사가 고려이전에 창건된 것이 확실하므로 혜장이 주장한 신라말의 창건설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아직 대규모 사찰의 면모는 갖추지 못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흥사가 크게 중창된 것은 서산대사(西山大師)가 대흥사를 '삼재가 들어오지 않는 곳이요, 만세토록 파괴됨이 없는 곳이며, 종통의 소귀처(三災不入之處 萬歲不毁之處 宗統所歸之處'라 보고 자신의 의발(衣鉢)을 대둔산에 전할 것을 부촉한 임진왜란 뒤의 일이다. 1604년(선조 37)에 해남의 외딴곳에 의발을 전한 서산대사의 배려에 의해서 배불(排佛)의 강압속에서도 많은 인재를 배출하는 선교양종(禪敎兩宗)의 대도량으로 면모를 일신하게 되었다.
1665년(현종 6)에는 심수(心粹)가 대웅전을 중창하였고, 1669년에는 표충사(表忠祠)를 건립하였으며, 1811년(순조 11)에 천불전이 불타자 1813년에 완호(琓虎)와 제성(濟醒)이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흥사는 배불의 그늘속에서도 수 많은 강사와 종사를 배출하였다. 그 대표적인 고승은 13 대종사(大宗師)와 13 대강사(對講師)이다.
13 대종사를 출생순으로 열거하면 해동 화엄종의 중흥조로 존경받았던 의심(義諶), 담론(談論)을 잘해서 많은 사람들을 교화하였던 삼우(三遇), 화엄(華嚴)의 도리와 백가(百家)에 통달하였던 도안(道安), 육신보살(肉身菩薩)로 칭송받았던 추붕(秋鵬), 전국을 순방하며 화엄대회를 열었던 지안, 그 학문이 유학자들 사이에서도 명망이 높았던 대우(大愚), 검소와 청빈의 생활로 평생을 살았던 회정(懷淨), 문자를 떠난 곳의 진리를 설파하여 마음이 근원을 찾도록 가르쳤던 새봉(璽 ), 대흥사의 정진당(精進堂)에서 늘 화엄법회를 열었던 체정(體淨), 인욕행이 남달리 뛰어났던 해원(海源), 대승경전에 통달하여 많은 저술을 후세에 남겼던 유일(有一), 다선일미사상(茶禪一味思想)으로 이름난 의순(意恂)등이다. 13 대강사들은 모두가 제10대 대종사였던 체정의 문도로 원오(圓悟)·광열(廣悅)·영우(永愚)·승제(勝濟)·성규(聖奎)·정일(鼎馹)·태관(泰瓘)·행인(幸仁)·복혜(福慧)·윤우(尹佑)·시연(示演)·혜장(惠藏)·각안(覺岸) 등이다.
《대둔사지》에 의하면 대흥사의 옛모습은 남원(南院)과 북원(北院)으로 나뉘어 있었다. 북원은 대웅보전·나한전·시왕전(十王殿)등 24개소의 당우가 있었다고 하나 현재의 사역은 북원보다 남원이 훨씬 넓은데도 좁은 북원쪽에 더 많은 당우가 집중적으로 건립되어 있다.
현재의 대흥사는 사지의 북쪽에서 흘러내리는 금당천(金塘川)의 냇물을 중심으로 가람이 남붇으로 나뉘어 있고, 지금도 남원·북원이라고 한다. 또 남원·북원의 법당들은 나름대로의 특색을 지닌 별원(別院)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북원의 대웅전을 중심으로 한 일군과 남원의 중앙부에 위치한 천불전과 서산의 유물이 있는 표충사를 중심으로 한 일곽, 다도로 유명한 초의(草依)가 중건하였던 대광명전(大光明殿)을 중심으로 한 일곽으로 분류할 수 있다. 대웅보전은 심수가 1665년 봄에 중건을 시작하여 1667년 가을에 완성한 건물로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다포집이다. 대웅보전의 현판은 조선후기의 명필인 이광사(李匡師)가 쓴 것이며, 내부에는 조선후기에 만든 목조삼존불과 광무연가에 조성된 후불탱화가 있을 뿐 비교적 단조로운 편이다. 대웅전 앞에는 침계루(枕溪樓)가 냇가에 연이어 있고 좌우에는 백설당(白雪堂)·세진당(洗塵堂)의 승사(僧舍)가 있다.
백설당에는 김정희가 쓴 '무량수전(無量壽殿)'의 편액이 있으며, 이 건물은 현재 큰 방으로 사용되고 있다. 대웅보전 동편에는 응진전(應眞殿)이 있으며, 안에는 석가여래삼존불을 중심으로 16나한상이 봉안되어 있다. 응진전앞에는 보물 제320호인 대흥사 응진전전 삼층석탑(大興寺應眞殿前三層石塔) 1기가 있다.
전하는 말로는 신라 자장(慈藏)이 중국에서 가져온 석가여래의 사리(舍利)를 봉안한 사리탑이라 한다. 전라남도유형문화재 제48호인 천불전은 1811년(순조11)에 불탄 뒤 1813년에 중건한 것으로 내부에는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52호인 천불상이 봉안되어 있다. 이 천불상은 옥돌로 만든 것으로, 완호 등 10인이 6년에 걸쳐 경주옥돌로 조성하였다.
천불이 완성된 뒤 해로를 통하여 이 절로 옮기다가 풍랑을 만나 표류하여 일본에 닿게 되었으나, 일본인들의 꿈에 이 천불이 나타나서 "우리는 지금 조선국 해남의 대흥사로 가는중"이라 하여 다시 대흥사로 돌아오게 되었다고 한다. 천불전이 좌우에는 불경을 배우는 학슬들이 기거하는 용화당(龍華堂 : 전남유형 제93호)과 강사가 기거하는 건물이 있으며, 정면에는 가허루(駕虛樓)가 있다.
표충사는 대흥사의 사격(寺格)을 보여주는 대표적 건물로서 임진왜란때 승병을 조직하여 공훈을 세웠던 서산대사와 그의제자 사명(四溟)과 처영(處英)의 영정을 봉안하였으며, 전라남도기념물 제19호로 지정되어 있다.
표충사 일원의 당우배치는 표충사를 중심으로 좌우에 표충비각(表忠碑閣)과 조사당(祖師堂), 정면에 삼문, 삼문 밖에는 2층 누각인 의중당(義重堂)이 있다.
또 이중당의 동쪽에는 서산대상의 유품을 비롯하여 사중유물(寺中遺物)을 보관하는 보장각(寶藏閣)이 있다.
표충사의 건물은 1669년에 건립되었고, 편액은 정조의 친필이며, 정면 3칸의 맛배집이다. 이중당은 당시 6군의 군수가 봄·가을로 표충사에 제사지낼 때 가지고 온 제물을 차리던 곳으로서 정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집이다. 보장각에는 선조의 하사품인 옥발(玉鉢)·비취옥발(翡翠玉鉢)·수저·금란가사(金 袈裟)·금자병풍(金字屛風)과 표충사총섭사령패, 서산대사의 친필·교지·신발·초의가 그린 관음도·대광명전 상량문·승군단(僧軍團)의 표지물·철제방패, 금과 은으로 쓴 불경, 금동불상 등 총 24종의 유물이 있다.
대광명전(전남 유형문화재 제94호)은 표충사 동쪽 300m 지점에 있으며, 조선후기에 초의가 건립하였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맛배집으로, 내부에는 비로자나불상을 봉안했고 정자( 字)의 천장에는 연화문과 운학(雲鶴)을 그렸다.
이 연화문과 운학문양은 그 색채뿐 아니라 문양자체가 다른곳에서 보기 힘든 작품이다. 전하는 말로는 초의가 직접 단청을 하였다고 한다. 대광명전 옆에는 고승들의 영정을 봉안한 정면 9칸의 보련각(寶蓮閣)과 요사채가 있다. 이밖에도 해탈문과 대흥사 역대고승들의 부도를 봉안한 비전이 있다. 이 비전에는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57호인 서산대사 부도를 비롯하여 대흥사 13 대종사와 13 대강사등의 부도 및 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