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미황사 대웅전(美黃寺 大雄殿)
관련링크
본문
◆ 지정번호 : 보물 제947호
◆ 지정일시 : 1988. 4. 1
◆ 소 재 지 : 전남 해남군 송지면 서정리 달마산
◆ 시 대 : 749년(경덕왕 8) 창건, 1751∼1754년 복원
◆ 크 기 : 정면 3칸, 측면 3칸, 다포계 팔작지붕
◆ 종 류 : 사찰건축
건물이다. 달마산 기슭에 자리잡은 미황사는 우리 나라 육지 가장 남쪽에 있는 절이다. 미황사 사적비에 따르면 통일신라 경덕왕 8년(749)에 처음 지었다고 한다. 그 뒤 임진왜란으로 불탄 것을 조선 선조 31년(1598)에 다시 지었고, 영조 30년(1754)에 수리하였다고 한다.
석가모니 불상을 모시고 있는 대웅전은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의 건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잡석을 쌓은 높직한 기단위에 둥근 주춧돌을 놓았으며, 주춧돌은 앞면 4개와 옆면 2개를 특이하게 연꽃무늬에 자라, 게 따위를 조각한 돌을 사용하였고 나머지는 자연석을 썼다.
주춧돌위에는 배흘림의 둥근 기둥을 세웠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공포는 내사출목(內四出目)·외삼출목(外三出目) 등 조선 중기 이후의 복잡한 다포계 양식을 보이고, 쇠서 역시 그 외부 끝을 굽어올린 암서와, 위에서 굽어내린 수서가 같이 짜여졌고, 그 내부에서는 연꽃봉오리를 조각하여 단 조선 후기의 특징을 보인다.
특히, 중앙칸 양쪽 기둥 위에는 용머리 장식을 조각해 붙였고, 내부에도 보아지 등의 장식이 화려하다. 제공의 쇠서는 위로 가볍게 올라간 모양으로 18세기 이후의 보편적인 경향을 보여준다. 천장은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천장 속을 가리고 있는 형식인데 가운데에 불교어인 ‘범(梵)'를 선명하게 새겨 놓았다. 건물의 전면은 빗살창을 달았으며, 측면에는 앞쪽 협칸에 출입문을 각 1장씩 달고 후면에도 각 칸마다 1개소씩 2장의 창문을 달았다. 내부 바닥은 우물마루를 짜고 고주 사이에 후불벽을 두어 탱화(幀畵)를 그렸으며, 그 앞에 불단을 두어 불상을 봉안하였다.
1982년 중수할 때 1754년(영조 30)에 중건했다는 상량문이 발견되었으며, 상량문이 묵서(墨書)된 종도리는 해체해 따로 보관하고 있다.
미황사 뒷산에는 ‘토말(土末)'이라고 쓰여진 비석이 있는데 우리 나라 육지의 끝을 표시한 것이다.
◆ 지정일시 : 1988. 4. 1
◆ 소 재 지 : 전남 해남군 송지면 서정리 달마산
◆ 시 대 : 749년(경덕왕 8) 창건, 1751∼1754년 복원
◆ 크 기 : 정면 3칸, 측면 3칸, 다포계 팔작지붕
◆ 종 류 : 사찰건축
건물이다. 달마산 기슭에 자리잡은 미황사는 우리 나라 육지 가장 남쪽에 있는 절이다. 미황사 사적비에 따르면 통일신라 경덕왕 8년(749)에 처음 지었다고 한다. 그 뒤 임진왜란으로 불탄 것을 조선 선조 31년(1598)에 다시 지었고, 영조 30년(1754)에 수리하였다고 한다.
석가모니 불상을 모시고 있는 대웅전은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의 건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잡석을 쌓은 높직한 기단위에 둥근 주춧돌을 놓았으며, 주춧돌은 앞면 4개와 옆면 2개를 특이하게 연꽃무늬에 자라, 게 따위를 조각한 돌을 사용하였고 나머지는 자연석을 썼다.
주춧돌위에는 배흘림의 둥근 기둥을 세웠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공포는 내사출목(內四出目)·외삼출목(外三出目) 등 조선 중기 이후의 복잡한 다포계 양식을 보이고, 쇠서 역시 그 외부 끝을 굽어올린 암서와, 위에서 굽어내린 수서가 같이 짜여졌고, 그 내부에서는 연꽃봉오리를 조각하여 단 조선 후기의 특징을 보인다.
특히, 중앙칸 양쪽 기둥 위에는 용머리 장식을 조각해 붙였고, 내부에도 보아지 등의 장식이 화려하다. 제공의 쇠서는 위로 가볍게 올라간 모양으로 18세기 이후의 보편적인 경향을 보여준다. 천장은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천장 속을 가리고 있는 형식인데 가운데에 불교어인 ‘범(梵)'를 선명하게 새겨 놓았다. 건물의 전면은 빗살창을 달았으며, 측면에는 앞쪽 협칸에 출입문을 각 1장씩 달고 후면에도 각 칸마다 1개소씩 2장의 창문을 달았다. 내부 바닥은 우물마루를 짜고 고주 사이에 후불벽을 두어 탱화(幀畵)를 그렸으며, 그 앞에 불단을 두어 불상을 봉안하였다.
1982년 중수할 때 1754년(영조 30)에 중건했다는 상량문이 발견되었으며, 상량문이 묵서(墨書)된 종도리는 해체해 따로 보관하고 있다.
미황사 뒷산에는 ‘토말(土末)'이라고 쓰여진 비석이 있는데 우리 나라 육지의 끝을 표시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