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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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물전라우수영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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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정번호 : 전라남도 기념물 제139호

◆ 지정일시 : 1992. 3. 9

◆ 소 재 지 : 전남 해남군 문내면 선두리 1161외

◆ 시 대 : 조선시대

◆ 규 모 : 일원(14,343㎡)

◆ 종 류 : 성지
고려말 1377년(우왕 3년) 무안 당관포(唐串浦)에 수군처치사영(水軍處置使營)이 설치된 뒤 세종 22년(1440)에 들어와 현재의 위치인 해남 황원관에 이를 이설하였으며, 1465년(세조 11년)에 수군절도사영(水軍節度使營)으로 승격·개편되었다. 당시 이곳은 해남현으로부터 서쪽으로 70리, 진도군으로부터 북쪽으로 30리 떨어진 현지에 위치하였으며 성종때(1479) 순천 내례포에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영이 따로 설치된 후부터 본영은 전라우도수군절도사영(약칭 전라우수영)이라 칭하게 되었다.

본영의 영역은 남북간의 길이가 10리, 동서간의 넓이가 15리에 이르렀으며, 영성은 석축의 둘레 3,843척, 높이 11척, 여첩 607개, 호지 3개소의 규모를 갖추고 있었다. 조선후기의 기록(1787년/정조 11년, '전라우수영지')에 의하면 영내의 민호는 620호, 수군장졸의 병력은 1,085명을 보유했던 것으로 나타나 있다. 한편 본영의 관할구역은 시대에 따라 적지 않은 변화가 있었으나, 임진왜란시 한때는 전라우도 연해지역 14관을 관할하였을만큼 전시에 있어서 군사적 규모의 역할이 매우 컸음을 알 수 있다.

1597년 정유재란때 본영의 수사 김억추(金億秋)는 통제사 이순신과 더불어 칠천량패전이후 남은 소수의 병력과 영내의 남녀노소를 총동원하여 명량에서 서쪽으로 상륙을 시도한 일본군을 대파하였다. 이것이 바로 정유재란중 최대의 전과를 거둔 명량대첩이었으니, 명량은 본영의 선창으로부터 불과 5리도 떨어져 있지 않은 급조류의 해협으로 천험(天險)의 관방(關防)을 이룬 것이다.

정유년 9월 16일, 조선수군은 불과 12척의 전선으로 200여척의 적선단을 맞이하여 종일 싸운 끝에 100여척의 적선을 격파하였던 것이다. 이때 영성 밑에 사는 전 주민들이 일시에 의병이 되어 군세를 북돋아 대승을 거두게 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당시 체찰사 이원익이 조정에 알려 현지의 주민들에게 면세은전을 내렸으니 그 혜택이 조선후기까지 계속되었다고 한다.   

성내에는 현재 336가구가 살고 있으며 529필지에 92,047평의 면적을 차지하고 있다. 추정된 바로는 우수영의 축성 부분의 전체길이가 1㎞이상이  될 것으로 여겨진다. 현재에 남아있는 부분은 7개소로 약 200m에 이른다. 현재에는 주택들이 성벽을 가로질러 앉아 있기 때문에 정확히 실측을 할 수는 없다.

우수영의 축성은 설치위치로 보아서는 해안성, 축성재료로 보아서는 토성과 석성의 혼합성, 평면형태로 보아서는 방형과 원형의 중간형태인 부정형성, 축성방법으로 보아서는 편축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성돌의 크기는 일반적으로 아래쪽은 150㎝ 이상이 되는 것들도 있으나 올라가면서 50㎝에서 30㎝정도로 작아진다.